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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사

발생기

고려 말 정치적 혼돈으로 인해 고려청자의 중심제작지 였던 강진, 부안의 자기소가 해체 되면서 전국적으로 요업이 확산된다.
14세기 중·후반의 청자에서 분청사기로 이어 지는 중간 단계의 청자가마는 김해에서도 발굴되었는데 생림면에서 발굴된 이 가마는 길이 21m, 너비 2m, 경사도 16°가량으로 대접과 접시, 잔, 매병, 도지미 등 일상 생활용기들이 출토되었다. 주로 태토가 조잡하고 기벽이 두껍고 암록색을 띠며 무늬는 연판문(蓮瓣文), 여의두문(如意頭文), 운문(雲文) 등 다양하지만 전형적인 청자에 비해 퇴화된 형태이다. 이 시기의 청자는 종래는 분청사기로 분류 되기도 할 정도로 분청사기와 구별이 어렵다. 청자는 정형은 잃었지만 그대로 분청사기로 이어지며, 곧 상감청자의 기법을 응용한 분청인화기법이 발생하였다. 인화문은 회색태토에 도장같은 시문도구로 국화문 따위를 찍고 그 위에 백토로 분장하여 상감과 같은 기법을 나타내는 것이 특징이다.
<생림 청자가마에서 출토된 상감분청사기 파편>

발전기

이 시기의 가마터는 전국으로 골고루 분포되어 있으며 기존의 상감(선상감, 면상감), 인화뿐 아니라 박지,조화(음각) 등 다양한 기법이발전하여 절정기를 구가한다. 태토는 정선되어 밝아지고 유약은 잡물이 없이 투명하며 고려적인 전통에서 벗어나 조선적인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대접의 경우 듬성듬성하게 찍던 무늬 에서 발전하여 그릇 전체를 가득히 채워 무늬 구도상 빈틈없는 짜임새를 보인다. 관청이름과 생산지를 표시하기 위해 상감으로 글자를 새기기도 하는데, 김해에서는 김해(金海)라는 명문이 있는 분청사기와 장흥고(長興庫)명 분청이 많이 출토되었다.
김해 상동면 가마터가 이 시기에 속한다.
박지·조화기법은 전라도를 중심으로 발전했으며, 경상도에서는 시기가 늦을수록 점차 인화·귀얄기법이 혼재되고 무늬의 정밀도가 떨어지는 경향이 나타난다.
<“김해” 명문이 쓰여진 분청사기>

쇠퇴기 및 소멸기

세조 연간에 설치된 관요(광주분원)의 영향으로 무늬는 서서히 해이해지고 유태에 잡물이 많이 섞여 소규모화 되는 경향을 띠면서 귀얄기법이 현저히 증가하고 있다.
또한 계룡산가마에서는 철화 기법의 분청사기가 생산되었으며, 상감과 인화 기법이 쇠퇴하고 귀얄과 덤벙(담금)분장기법이 유행하였다. 이 시기의 가마터에서는 흐트러진 인화기법과 귀얄기법의 도편이 함께 수집되는 한편 백자도 수집되었다. 이때의 인화 기법은 무늬의짜임새라든지 압인(押印) 상태가 고르지 못하고, 또 얕게 압인되어 백토 감입의 상태가 지저분하게 나타나 제작의 소홀함이 현저히 보여진다.
소멸기에는 귀얄기법과 분장기법이 거의 사라지고 백자로 전환하였다. 다만 백토의 귀얄 기법만이 일부 백자에 영향을 주어 백자 태토위에 백토분장을 한 경우가 있는데, 백자에 그 기법이 일부 흡수되면서 분청사기는 자연 소멸되고 말았다.

현대의 분청사기

경상도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와 등에 기록된 바와 같이 김해는 도자기 생산지로 유명하였다. 분청사기는 조선전기 200년간 관청은 물론이고 서민에까지 두루 쓰인 가장 한국적인 도자기로 청자와 백자와는 또 다른 새로운 미학과 양식을 창출하였다.
또한 추상적이고 도안화된 문양은 오히려 추상화 등 현대 회화와 닮아 있어 도예 작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도자기로 평가 받고 있다.
김해에는 마치 분청사기의 발생기처럼 전국에서 자연스럽게 모여든 100여명의 도예가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또 그 성과를 모아 매년 분청 축제도 개최하여 있어 명실공이 현대 한국 분청사기의 중심지로 각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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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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